부드러움을 소유한 사람
♥ 부드러움을 소유한 사람 ♥
생명력이 있는 사람은 넘치는 기상으로 충만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은 모두 부드럽습니다.
그 사람에게 넘치는 기상이 있는데도 부드럽다는 것은 중요한 특징을 가진 사람입니다.
반면에 무조건 경직된 것은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뻣뻣해 집니다.
하지만 살아 있는 어린아이는 부드럽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온몸이 딱딱해 집니다.
은혜가 충만한 사람은 일단 부드럽습니다. 자극에 대한 큐션이 있어서 기분 나쁜 소리를
들어도 신경질적으로 쉽게 반응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상처가 있고 문제가 있는 사람들은
경직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말 한마디라도 잘못하면 화를 내고 폭발적인 반응을 보입니다.
가끔 인터넷 상에 글을 날카롭게 쓰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에 대해서 정의롭다고
야야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정의가 아니요 상처입은 사람의 외침이요 신음입니다.
'얼마나 상처가 많으면 그럴까' 라고 생각하는 게 정답입니다.
그것을 말로 받아들이면 안 되고, 가슴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봄에 나는 새싹이 부르러운 이유는 자라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유연성이 있는
사람은 부드럽기 때문에 날마다 성장합니다. 생명의 역사가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경직된 사람은 성장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거다!' 하고 그것만 불들고 있는
사람은 그 자체가 죽음입니다. 율법주의의 특징은 죽음과 경직됨입니다.
사람을 볼 때 개념으로 묶어 두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에 대해 개념으로 접근하는
것이 제일 악하다고 봅니다. 가령 "남자는 이러이러해야 돼" "남자가 그렇게 말하면 안 돼"
"여자는 36-24-36몸매가 되어야 한다" 라는 것은 전부 개념입니다.
그런 개념의 틀로 묶으면 사람도 찍어 나온 국화빵처럼 기계가 되어 버립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남자도 여자도 이 개념 앞에 모두 무너져버립니다. 비너스같이
생긴 여자가 어디있습니까? 미켈란젤로의 <다비다>상처럼 생긴 남자가 어디있습니까?
우리사회가 루키즘(lookism)이라고 해서 외모지상주의에 빠져버린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로 여자는 어떠해야 되고 남자는 어떠해야 된다는 개념 때문입니다,
사람의 모습이 좀 이상해 보이면 어떻습니까? 외모는 전부가 아닙니다.
인간이 인간 다울 수 있는 것은 바로 그런 것이
아닙니까? 더불어 믿음을 나누고 소망을 나룰 수 있는 것이 인간입니다.
속지 마십시오. 외모가 아니라 그 속에 있는 인간의 영혼을 만날 줄 알아야 합니다.
개념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정죄만 하지만 인격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용납할 줄
압니다. 대화를 나누다가 다른 사람의 약점을 품을 줄 압니다. 그러하기 위해서는
받아들일 수 있는 부드러움이 진정으로 중요한 능력이 됩니다.
생명은 반응합니다. 어린아이가 엄마를 보고 웃어야 좋은 것이 아닙니까?
젊은이들을 한데 모울 때 이쪽에는 남자, 저쪽에는 여자, 이렇게 따로 앉혀놓고
율법적으로 키웁니다.
서로 눈짓을 하면 안 된다고 합니다. 조금만 눈치를 주면 음란의 영이 역사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건 아닙니다. 남녀가 한 방이 있으면 벌써 눈빛이 타오르지 않습니까?
그러나 '나는 신사야' 라고 절제하면서 '어떻게 하면 나의 매력을 잘 표현할 수 있을까?'
또는 '어떻게 하면 저 여자와 자연스럽게 다리를 놓을 수 있을까?' 하는 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할 뿐입니다.
"맛있는 음식이 있다. 먹고 싶다. 그러나 예의범절이 중요하니까. 어른 먼저 드시는
것을 본 다음에 먹는다. 너무 천박하게 나만 먹으면 안 되므로 내가 먹을 때 누리는
만족감과 상대에게 줄수 있는 만족감을 나눠가면서 품위 있게 먹는 것이다."
이것이 안간관계이고 사람이 살아가는 법이 아닙니까?
그 안에서 희생을 보이고 그 안에서 섬김을 보이는 것입니다. 그게 부드러움입니다.
넘치는 기상이 있으면 반드시 이런 부드러움이 있어야 합니다.
부드러움을 소유하여 넘치는 기상으로 살아가는 당신이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