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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적인 기쁨

산 그리고 바다 2020. 8. 13. 13:45

 



 

창조적인 기쁨

 


우리들은 일반적으로 ‘편안한 것이어야 좋은 것이다’라는 생각에 물들어 있다.
로렌스(D. H. Lawrence, 1885-1930, 영국 소설가)는 말하기를 인생의 진정한
기쁨은 반드시 육체적인 쾌락과 결부되어 있지 않다고 했다.


쾌락이 단순히 소비적인 행위라면 기쁨은 고통이라는 자각 없이는 얻어지지 않는
‘창조적 쾌락’에 속한다는 사실을 강조한 것이다.
“모든 창조적인
노력 속에서라야 진짜 기쁨이 있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괴로움과 아픔을 거부한 채 인생을 산다면 종내에는 권태로움에
직면하게 되지만, 현재의 고통과 아픔을 거부하지 않고 살아간다면
결국엔 진정한 기쁨의 소유가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사실 우리는 사람이기 때문에 모든 것 ‘쉽게’ 얻고 싶어 한다.
심지어 젊은이들은 많은 노력과 고통 끝에 얻어야 할 남녀 관계의 고귀한
기쁨마저도 그저 아이가 심심풀이로 사탕을 빨다가 뱉어 버리는 것 같은
자극적이고 손쉬운 형태로 취하려 합니다. 그러다보니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이
권태로움이 일상이 된, 가엾은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지 모른다.


밥을 먹는 즐거움은 밥을 먹기 위한 고통의 과정을 안고 있기 때문에 주어진다.
밥벌이가 힘들기에 밥 먹는 즐거움이 귀하고 크다는 것이다.
밥 먹는 게 하나도 힘들이지 않고 해결된다면 거기에서 더 큰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복지국가에서 생기는 90퍼센트의 문제를 보라. 아무 문제도 없는 것 같은 그 나라에서
해마다 자살률과 정신 질환자들의 수가 증가하고 있다는 보고는 우리를 살아있게 만드는
창조적인 기쁨이란 결코 편안함 속에 주어지지 않음을 반영해 주고 있다.


그렇다면 고통을 모르고 나이 들어간다는 건 ‘불의’라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반면에 살아온 인생이 괴로움과 고통 속에 있었다면, 그리고 현재도 고난 속에서
기도하고 있다면 그는 궁극적으로 기쁨을 아는 자, 기쁨을 누리는 자가 되리라고 본다.


요사이는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이 옛말이라고들 한다.
집이 잘살아야 아이들도 공부를 잘해서 성공하기 마련이라는 데에 모두가 동의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일시적인 현상이다. 잘사는 집 아이들이 가난한 집 아이들보고
고등학교 가고 대학교 들어가는 것은 수월할지 모르지만, 편안한 환경에서
고통을 모른 채 살아간다면 그것은 궁극적으로 경쟁에서 뒤처질 수밖에 없다.
아무 고통도 모르는 인생에게는 창조의 참된 의욕이 없는 까닭이다.


셀리(P. B. Shelly, 1792-1822, 영국 시인)의 말처럼,
우리의 가장 진실한 웃음에는 고통이 스며있다.
통쾌하기 웃는 것 같지만 그 웃음의 배후에는 말 못할 고통이 있는 법이다.
결국 고통을 격고 나서야 가장 진실한 웃음이 터져 나온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인생의 진정한 기쁨이란 외부적인 조건과 형편에 있는 게 아니라
각자의 가슴속에 있음을 깊히 명심해야 겠다.


고난을 창조적 기쁨으로 승화시켜 승리하는 믿음의 삶을 사는 당신이길.....